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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국민 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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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우 기자 작성일22-05-20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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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역사 속으로


청와대의 주소는 서울시 종로구 청와대로 1번지다.

북악산을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시청과 종로·을지로 등 도심 사무실 밀집 지역의 북쪽에 있다.

청와대의 주소는 일제 강점기인 1911년 12월 20일 ‘광화문 1번지’로 정해졌었는데 광복 다음 해인 1946년 1월 1일 부터 일본식 주소가 한국식으로 바뀌면서 ‘세종로 1번지’가 되었다.


조선시대
경복궁의 후원터 청와대 자리가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도읍을 옮기자는 주장이 시작되면서 부터였다.

조선의 첫 임금인 태조 이성계는 1394년 새로운 서울을 세우기 위한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이라는 특별 기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관리들을 보내 궁궐터를 찾아보게 했는데 고려 숙종 때의 이궁 자리는 너무 좁아서 새로 궁궐을 짓기가 어려우므로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서 궁궐을 지어야 한다고 의견이 모아졌다.

즉, 오늘날의 청와대 터에서 좀 더 내려간 평지에 왕궁을 짓기로 한 것이다.태조는 그 해 12월 정도전으로 하여금 궁궐 짓는 일을 시작하도록 했고 이듬해에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9월에 궁을 완성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궁이 바로 경복궁이다.

경복궁이 완성된 뒤 세종 8년인 1426년 현재의 청와대 자리에 경복궁의 후원(뒤뜰)이 조성되었다. 이때 후원에는 서현정, 연무장, 과거 시험장이 만들어졌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경복궁과 이 곳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경복궁과 그 후원인 지금의 청와대 근처는 270년 동안 방치되었다가 고종 2년인 1865년 흥선대원군의 노력으로 다시 지어졌다.

이 당시에 함께 건축되어 후세까지도 이름을 남기게 된 경무대도 지어졌는데, 경무대는 창덕궁 후원의 춘당대 뒤를 이어 인재를 등용하는 ‘과거장’으로서의 기능을 이어갔다.

경복궁은 고종 33, 건양 1(1896)년 소위 아관파천으로 고종 황제가 경운궁으로 떠나자 정궁으로서의 위상이 급속히 추락했다. 고종이 이어(移御)한 경운궁은 대한제국 황궁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증축했다.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이화장에서 일제 총독 관저였던 경무대로 거처를 옮겼다.

경무대는 제4대 윤보선 전 대통령 시절부터 ‘청와대’라는 지금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푸른 기와의 청와대로 불리고 있다.


고려시대
이궁(離宮)이 있던 자리
청와대 부근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숙종 때인 1104년 무렵 고려의 이궁이 이 곳에 들어서면서 부터다.

고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도읍이었던 개경(지금의 북한 개성)과 함께 서경(평양), 동경(경주)의 세 곳을 삼경으로 두었는데 숙종 때 동경 대신 이곳에 이궁을 설치하고 남경으로 삼았다. 남경이란 ‘남쪽의 서울’ 이란 뜻이 담겨져 있다.


일제 강점기 시대
청와대 자리
1929년 조선총독부 통치 20주년 기념으로 개최한 조선박람회가 경복궁과 옛 후원 자리에서 열리면서 이 곳의 조선시대 및 대한제국 건물들은 대부분 철거되었다.

일제는 1937년부터 1939년에 걸쳐 조선박람회 이후 한동안 공원으로 남아있던 옛 후원 자리에 조선 총독의 관사를 지었다. 이후 조선 총독의 관사 일대를 경무대라고 불렀다.


청와대 본관
조선시대 서울의 주산인 북악산의 정남향에 자리 잡고 있는 본관은 대통령의 집무와 외빈 접견 등에 사용된 중심 건물이다.

일제 강점기 조선 총독이 거주하던 곳을 대통령 집무실 및 관저로 사용한다는 것이 대내외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주장이
제기돼 1991년 9월 4일 신축됐다.

전통 목구조와 궁궐 건축양식을 기본으로 가장 격조 높고 아름답다는 팔작지붕을 올리고 총 15만여 개의 한식 청기와를 이었다.

2층 본채를 중심으로 좌우에 단층의 별채를 배치했다.


대통령 관저
대통령과 그 가족이 생활하는 대통령 관저는 대통령의 공적인 업무공간과 사적인 업무공간을 구분하기 위해 건립됐다.

생활공간인 본채와 접견 행사 공간인 별채가 배치돼 있고 앞마당에는 우리나라 전통 양식의 뜰과 사랑채가 자리잡고 있다.

대문은 전통 한옥의 분위기에 맞는 삼문으로 만들어졌다.

전통적인 목조 구조로서 궁궐 건축양식인 팔작(八作)지붕의 겹처마에 한식 청기와를 얹은 ㄱ자형 지붕 형태를 띠고 있다.


수궁터
지금 청와대가 위치한 곳은 조선시대 경복궁의 후원이었다.

고종 5년에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융문당, 융무당, 오운각 등의 건물이 들어서고 과거시험이나 무술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현재의 수궁터는 당시 왕궁을 지키는 수궁(守宮)의 자리였다. 일제시대 조선총독부는 이 수궁터에 총독의 관사를 지었으며,
광복 이후에는 미군정 사령부 하지 중장의 거처로 사용되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경무대, 청와대로 이름이 바뀌어 가며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됐다.

1991년 청와대 본관을 새롭게 건축한 후 1993년 11월 역사 바로세우기 차원에서 그 건물을 철거하고 수궁터로 복원했다.


상춘재
청와대를 방문하는 외국 귀빈들에게 우리나라 가옥 양식을 소개하거나 의전 행사, 비공식회의 장소 등으로 사용됐다.

현재 상춘재 자리에는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관사 별관인 매화실(梅花室)이 있었는데 이승만 대통령 시절 상춘실(常春室)로 그 이름을 개칭해 사용해 왔으며, 1978년 3월 천연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양식 목조건물로 개축했다.

이후 상춘재(常春齋)로 이름을 명명하고 1983년 4월 연면적 417.96㎡의 전통적인 한옥식 가옥으로 신축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됐다.


녹지원
청와대 경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120여 종의 나무와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식수가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으로 문·무의 과거를 보는 장소로 이용됐으며, 이후 정원이 되면서 가축사육장과 온실 등의 부지로 사용됐다.

야외행사장으로도 이용됐으며 매년 봄 어린이날 행사를 시작으로 어버이날, 장애인의 날 등 각종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졌다.

또 주변에는 녹지원을 상징하는 소나무인 한국산 반송이 있는데 수령은 약 150여 년에 이르며 높이는 16m이다.


대통령비서실
대통령비서실은 여민1·2·3관으로 이뤄져 있다. 여민은 ‘여민고락(與民苦樂)’에서 따온 이름으로 ‘대통령과 비서진들이 국민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민1관은 2004년에 완공됐으며 2관(구 신관) 및 3관(구 동별관)은 각각 1969년, 1972년에 건립됐다.

여민1관에는 대통령 간이집무실 등의 주요시설이 위치했으며 에너지 절약을 위해 외단열 시스템을 적용해 건립됐다.


춘추관
1990년에 완공된 춘추관은 대통령의 기자 회견 장소와 출입 기자들의 기사송고실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춘추관이라는 명칭은 고려와 조선시대 역사기록을 맡아보던 관아인 춘추관·예문 춘추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엄정하게 역사를 기록한다.는 의미가 오늘날의 자유 언론의 정신을 잘 상징한다는 뜻에서 채택됐다.

춘추관은 중위 경관과 잘 어울리게 맞배지붕에 토기와를 올려 전통적인 우아한 멋이 깃들여져 있다.


무궁화동산
무궁화동산은 옛 중앙정보부의 궁정동 안전가옥(안가) 터에 마련된 시민휴식공원이다.

본래 이곳은 청와대 구내로 출입이 금지되었던 곳이었으나 1993년 청와대 앞길이 개방된 뒤 시민공원으로 조성됐다.

공원 내에는 나라꽃 무궁화와 함께 각종 수목과 야생화가 식재되어 있으며 맞은편에는 분수대가 있어 청와대를 찾는 관광객과 인근 주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칠궁
칠궁은 조선 시대 때 왕을 낳은 후궁들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청와대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는 육상궁(毓祥宮·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과 저경궁(儲慶宮·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 대빈궁(大嬪宮·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
연호궁(延祜宮·영조의 후궁 정빈 이씨), 선희궁(宣禧宮·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 경우궁(景祐宮·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 덕안궁(德安宮·고종의 후궁 엄씨) 등 7개의 사당이 있어 칠궁이라 한다.

1968년 이후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됐으나 2001년 11월 24일부터 다시 일반에게 공개됐다.

관람객 방문이 가능해진 이후 기존의 청와대 관람과 연계해 칠궁 관람이 이뤄지곤 했다.


출처 : 대통령 기록관
김태우 기자   outca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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